Wednesday 5 December 2012

여기가 파라다이스.

내눈엔 여기가 파라다이스로 보인다. 내 눈도 이젠 삐어버린듯.. 흠




하늘아래 파라다이스는 없다. 모두가 행복할수 없고 모두가 누릴수도 없다. 얻는자가 있다면 뺏기는 자가 있고, 누리는 자가 있다면 눌러진 자가 있다.




있는 자들은 이런곳에서 누워 살을 태우고




없는 자들은 이런곳에서 서서 살을 태운다.








똑같은 장소가 누구에겐 웃음을 주고 누구에겐 눈물을 준다.




누군 넉넉함 가운데 남기며
누군 없는 가운데 비운다..


에이 똥 같은 세상.



Saturday 1 December 2012

나의 법정 소송 3탄




다음날 새벽, 잠이 오지 않아 숙소 앞의 사랑의 교회의 새벽예배를 가기로 했다. 교회 안에 일찍 들어가자 마자, 어두운 교회에서 들려오는 파이프오르간 소리, 정확한 곡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맘속에 있는 참 평안은 누구도 앗아갈수 없네, 주님은 내맘에 친구 되시오니, 나 주없이 살수 없네, 주님만 구원하시네,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없이 살수 없네" 였던거 같다. 그냥 앉자 마자, 무거운 마음에 뭉쳐있던 것이 녹는 느낌이 들고, 그냥 주륵 주륵 눈물만 흘렸다.
"일이나, 수입, 성공, 인정 받는 거, 다 소용이 없고, 진정으로 내가 필요한것은, 이 평안,, 사랑을 받고 있다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주님께서 날개 품에 품어주시며, 이끄심에 맡겨야 한다는, 그 마음이 맘에 다시 한번 새겨졌다.

예배가 끝나고, 숙소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변호사를 만나서, 경찰서에 갔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조사를 받고 있었다. 들어보니, 면허 없이 길거리 매장을 하다가 걸린 사람, 보증 잘못 서서 조사 받으러 온사람, 별의 별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 내가 앉아 있고, 나도, 거창한 명예훼손죄와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이라는 ''있어 보이는 죄명으로 앉게 되었다.

개인 신상에 대한 조사, 내가 영국인이라는 것을 영국 운전 면허증으로 대신했다. 계속 나에게 여권 여부와, 여권 번호를 데라고 하는 것을 그냥 안가지고 왔고, 모른다고 말을 하였다그리고, 형사는 나에게 나의 발표당시, 고소인이 녹음하고 그것을 녹취한 자료들을 내밀었다.
"다 말하긴 힘들고, 이 녹취본을 보고 본인이 말한 것 맞는지 말해봐요" 라고 말을 하였다.
살면서, 정말 많은 말을 하고 했지만, 내가 3개월 전에, 별 생각 없이 말을 했던 것이, 쉽표까지 빠짐 없이, 그대로 영화 대본처럼, 내앞에 주어졌다.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정말 세상에 모든것이 숨길것이 없고, 숨어서 하는 말/행동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제가 말한 것이 맞습니다" 라고 난 서류를 돌려주면 말을 하였다.
"왜 이런 말을 했습니까? 여기 저기 명예훼손이 되는 내용들이 많네요. 이것 때문에, 명예훼손으로 고발 되었어요." 라고 퉁명스럽게 형사는 말을 했다. "언제 출국합니까? 내일요? 미뤄야 할텐데요, 대질 신문도 해야 하고"라는 형사의 말에, 겁이 덜컥 났다. 나를 고소한 사람들에게 화가 났지만, 그들을 또 만날 내공이 나에게는 없었다. 

어제 변호사들이 말을 해준데로, 난 내가 이 영국 회사 소속이 아니라, 외부 경영 컨설턴트라고 소개를 하고, 나의 명함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얼굴색이 변했다. "한국 회사는 당신이 영국 회사 소속인줄 알고, 고소를 했고, 그래서 출국 금지 조치까지 신청까지 한듯 한데, 엉뚱한 사람이 왔네요. 이거 뭘 조사를 해야 하는건지?" 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조금 상황이 나아짐을 느낄수가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이 경찰이 자신의 판단한 바를 보고 할지는 아직 몰랐다. (To be continued) 

나의 법정 소송 (2탄)




우리나라에서 최고라는 로펌 두 업체가 붙는 싸움에 내 이름이 오르락 내리락 할때 그 기분은, 희한했다김앤장의 3명이 나를 방어한다는 소식에 한숨은 놓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시 편히 잘수 있는 상황도 아니였다. 김앤장에서도, 내가 기소가 될수 있는 가능성과, 또한 진행이 될 경우, 벌금형/실형 및 사건이 마무리 될때까지 증거인으로 출국 금지 조치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왔었다. 이러한 내용 자체가 나의 심장을 떨리게 하였다.

계속 드는 생각은, 내가 왜 이 회사 일을 했을까? 비록, 이 회사 일을 지난 2년간 넘게 보면서, 1억에 가까운 자문료를 받기는 하였지만지금 나의 심정은 돈이 문제가 아니였나.. 나에게 옥쇠가 쓰여져있고, 내가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풀리지가 않는 다는 것이었다.

평소 가족들에게 기도 요청을 많이 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 교만도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다 부모님께 이모에게 나눌수 있고 설명할수 있을까설명하기 귀찮고, 이해나 하실수 있으실까? 라는 생각과, 이제는 부모님의 품에서 벗어나, 나의 영역을 만들고, 나의 일과, 나의 사역을 만들고자 하는 독립 의식이 나에게는 강하게 있기때문에, 부모님은 내가 바쁜것으로만 알고 계셨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셨다.
겸손하게 컴퓨터에 앉아서, 내가 했던 일들과, 현재 상황, 또한 앞으로의 법률적으로 일어날 일들, 나에게 닥칠 가장 최악의 상황,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도를 요청드렸다. 신앙이 있던 없던, 기도의 힘을 믿던 그렇지 않던, 나의 이 편지는 내 자신에게 큰 도전이었고, 그 자체가 치료 효과가 있었던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내가 나자빠져도, 나를 잡아줄, 나를 안아줄, 받아줄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또한 일에 대한 나의 소유의식을 내려놓게 되었다나의 일, 내가 짊어져 가야 하는 나의 고유 영역에 가족과 친구를 들여 놓으면서, 그 자체만으로도, 나의 세상이 넓어지고, 감당할 힘이 배가가 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2월 말 4일 일정으로 서울로 출발을 하였다서울에 도착하여 클라이언트가 예약을 한 노보텔에 자리를 잡고, 바로 김앤장 사무실로, 3명의 변호사들을 만나러 갔다김앤장의 파트너중 한명이자, 서울지검 부장 검사 출신의 무서운 눈매의 변호사, 미구  및 한국 변호사이자, 외국 기업과 한국 기업간의 비슷한 사건을 많이 진행을 한 여자 변호사님과, 이제 사법고시후, 검사생활을 잠시 마치고, 들어온 나의 나의 또래의 주니어급 변호사와 미팅을 시작하게 되었다.

경찰이 나에게 물어올 예상 질문들, 내가 하지 말아야 할 말들, 또한 나와 함께 다닐 변호사가 해야 할 말등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가장 크게 걱정한 것은 상대가 태평양이라는 것, 그들이 어느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 또한 경찰과, 담당 검사등이 한국 기업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세로 이 사건을 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무엇보다, 영국 기업의 임원들이 바쁘기 때문에, 또한 귀찮고, 무섭기 때문에, 한국에 오려고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건이 마무리 될때까지 한국 계인 나를 출금금지로 붙잡고 있으려는 계획이라는 것이다이미 내가 내일 경찰에 출두할것을 알고, 출국 금지 조치를 신청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내일 경찰서 출두시, 바로 출국 금지를 신청할수 있기때문에 영국 여권을 가지고 안가고영국 운전 면허증을 가지고 가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얘기를 하면서, 변호인단이 나에게 해준말은 괜히 두 회사 감정싸움에, 손사장이 중간에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끼어서 이렇게 당하네요. 라는 말을 들었다. 미팅을 마치고, 다음날 오전 10시에 출두를 약속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날은 왜이리 춥고, 혼자 왜 이리 마음이 힘든지 무거운 걸음으로  숙소에 왔다.

나의 법정 소송 (1탄)


금융가에서 많은 연봉을 받는 그러한 전문인은 아니였지만 2009 , 나는 나의 삶을 보면서, 감사함도 있었지만 만족감도 있었다. 28살이라는 나이에 좋은 학교를 졸업했고, 예쁘고 똑똑한 아내와, 세상 어느 아이들보다 귀엽고 영리한 아들이 있었고, 비록 아직 나의 집은 아니였으나, 좋은 위치에 넓은 집에서 벤츠를 몰고 다녔고, 일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융통성 있게 하면서,규모있는 리테이너를 주는 4개의 클라이언트의 일들을 진행하는 1 사업가 였다. 차를 몰고, 외근이나, 클라이언트가 제공하는 좋은 좌석과, 5성급 호텔들을 이곳 저곳 다니며, '손대표, 손사장,' 소리를 들으면서, 남들이 부러워 하고, 멋있다 라고 얘기하는 일들과 삶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의 일들을 진행하면서, 여러 목표치가 있었고 이때문에, 항상 마음에 부담은 있었기 때문에, 일에 항상 매여있었던 나였다. 그러던 나에게 2010 2월에 있었던 소송은 크게 나를 깨우는 경고였다.

2010 2 중순, 클라이언트를 대신해, 한국에 법인을 새워놓고, 법인장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서울의 강남 경찰서에서 계속 전화가 오고, 사무실에까지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평생 경찰서와는 상관없이, 살았던 나에게 이소식은 충격이었다. 나를 그렇게 급하게 조사하고자 찾는 다는 말에,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으나, 오히려, 무슨일로 나를 찾는지를 모르는 것이 힘들어서, 조심히 한국의 강남경찰서에 담당 형사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다.
" 이제야 전화를 합니까? 지금 당신 어디에요? 조사를 해야 하는데, 어디에 있는 겁니까?" 퉁명한 목소리로 형사는 나에게 말을 했다.

" 영국 시민권자로, 영국에 살고 있고, 한국에는 출장으로만 나갑니다. 연락이 늦어서 죄송하지만, 이제야 저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라고 묻자, 형사는 귀찮다는듯, 말을 해주었다. "b라는 회사 알죠? 그회사에서 당신을 명예훼손죄로 고발을 했어요. 무슨 기업 설명회에서 발표할때 명예훼손하는 말을 공개적으로 한것을 녹음해서, 녹취본도 가지고 있으니, 나와서 조사를 받아야 해요. " 무서운 들어보지 못한 용어로 그는 나를 더욱더 두렵게 했다. "연락이 안되면, 내일정도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넘길려고 했는데, 언제 출두 할수 있어요?"라는 말에 계획은 없지만, 2 내에 한국에 들어가서 응하겠다라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2009 12 한국에서 클라이언트의 한국 진출을 위한 회사 홍보 행사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지원을 하고, 발표까지 한것이 기억이 났다. 원래 나의 클라이언트와 함께 일하던 한국의 b사가 나의 고객사가 직접 한국에 들어와서, 사업을 할것이라는 소식에 얹찮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들이 설명회를 들으러 오는 사람으로 가장한 사람을 보내서, 설명의 내용을 녹음하고, 이를 이용해서, 영국회사의 한국 진출을 막고자, 이런식으로 진행을 할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못하였었다.

만족했던 삶에서 갑자기 모든것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객사나 나에게 주었던 5백만원의 자문료, 돌려주고,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 감옥에 갖히면 어떻게 하나, 클라이언트가 소송 방어 비용을 데줄것인가? 한국에 도착해서 출금을 당하지는 않을지 많은 것이 궁금했고, 고민과 염려 걱정에 잠을 자지못하였다. 와이프가 자고 있으면, 컴퓨터를 들고 욕실에 가서, 계속 비슷한 케이스 판례들을 보고 고민을 하고 잠을 못자고 있었다.

생애 태어나서, 이렇게 심적으로 눌린적은 없었던것 같다. 웃을 힘도 나지 않았고, 컴퓨터만 키면, 판례를 보기 일수 였다. 또 다른 걱정은, 과연 소송 관련 금액 부분에도 나의 클라이언트가 감당을 해줄수 있는 가였다. 한국 기업은 변호사 수로 3-4위 하는 박화목 (태평양)을 선임하였다고 하며, 이는 꼭 이기겠다는 표시와 함께 우리가 벗어나오지 못할 증거가 있다는 자신감을 뜻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나의 클라이언트와 함께 한국의 김앤장과 일을 시작하였다. 우리쪽 증거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우리의 포지셔 을 나타내는 의견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관련하여서, 거의 매일같이, 검사와 경제사범을 조사하는 경찰서의 부서에 제출하는 서류들을 작성하고, 한국에 귀국할 날짜를 잡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The negativity of 'tolerance'

We talk of a tolerant society.  Tolerance is one of the critical values of modern society that almost all multicultural states uphol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