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17 December 2019

The negativity of 'tolerance'

We talk of a tolerant society. 

Tolerance is one of the critical values of modern society that almost all multicultural states uphold as essential. 

However, the meaning of tolerance traces back to the Latin "tolerantia" which means patience. 

The dictionary definitions also denote this suppressing and restrictive actions that are required. 

When a society is blooming, and there is plenty for all to share, this value may be 'tolerated'. But when things get tight, when an economy contract, when a 'sacrifice' of the incumbent 'positions', 'materials', and 'privileges' are required to offer up 'tolerance', social clashes take place. 

Is the value of tolerance a viable trait to demand of citizens? 

In the era of the Brexit, how far should the EU tolerate the UK's EU bashing? 
In the era of the second rising of China, how far should the US tolerate its rival that will eventually steal the global hegemony?
In the era of political correctness, how far ordinary families tolerate gender diversity and its demand for acceptance? 


'Tolerance is a social construct, and a set of artificial ideals that will not withstand the test of 'gluttonous' human society."

Necessary to 'appease' temporarily, and will not and should not be regarded as a panacea. 

tolerance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Thursday, 21 June 2018

일본

헐. 너무 오랜만에 글을 올리는...

이번 한 학기 수업이 마치고, 일본으로 향하는 길이다.
할일도 많고, 바쁜 시기이지만, 또 나름데로, 쉼도 갖고, 좋은 동기부여를 받기 위해서, 조금 일찍 출국을 한다.

어떤 만남이 있고, 어떤 경험이 있을까?  이동 가운데,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공급받을수 있으면 좋겠다.


Monday, 5 March 2018

도시와 교회


많은 교회들이 도시를 위해서 기도하며, 도시를 변화 시키는 것을 모토로 두고 있다. 
본인이 속해 있는 교회 또한, 4가지의 설립 목적중에 한가지는 도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서울이라는 도시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이유가 있을것이라는 것에 주목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도시를 변화 시키는 것 “Transform the city”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도시는 무엇인 것인가?

도시를 생각할 때 우리가 갖는 생각은 무엇인가? 
 편리함? 문화 생활? 정치 경제의 중심? 더러움? 

성경속에서 도시를 생각할 때 우리 머리속에 떠오르는 모델은 무엇인가? 카인이 도망자로서, 새운 첫 도시? 소돔과 고모라? 여리고? 예루살렘? 

우리는 도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다. 과연 우리가 변화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변화 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우리가 무엇으로 변화를 시키려고 하는지 (transform to) 를 모른다면, 우리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기 때문에. 

(Gen 4:17)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builded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에녹시는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첫 번째 도시이다. 
저주를 받은 가인이.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가 도시를 만들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인위적인 보호 장벽을 만든 것이다. 에녹성이 어떻다를 떠나서, 인간 사회 안에 있는 정체성과, 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이 도시 가운데 들어나고 있는 한 예인것이다.  도시는 이러한 인간의 보호받고자 하는 간절함에서 시작된것이라고 볼수 있다. 

바벨탑 - 다른 의미에서 바벨시를 보면, 그 안에서는 
They said to each other, “Come, let’s make bricks and bake them thoroughly.” They used brick instead of stone, and tar for mortar. Then they said, “Come, let us build ourselves a city, with a tower that reaches to the heavens, so that we may make a name for ourselves; otherwise we will be scattered over the face of the whole earth.”
다른 것이 들어나는 것을 볼수 있다. 그들 가운데, 혁신이 일어나고, 높게 건물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 과학이나, 건축 기술의 성장은 그들로 하여금 교만을 나타낼수 있는, 그들의 정체성을 한단계 표현할수 있는 랜드마크를 만드는 것이 이루게 된다.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도시가 죄악을 잉태하고, 그 죄악이 다른 모습으로 번져서, 모든 도시에 퍼진 것을 볼수 있다. 

도시는 강물처럼, 구성원들이 보호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더 나은 기회를 위해서, 모이는 곳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 그들 각자 각자의 여러가지 죄와, 욕망등을 가지고 모이는 곳이다. 

바울의 사역또한 도시 위주로 진행이 되었다. 도시에는 국가나, 민족을 이끄는 그리고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 내려지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회에게는 기회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또한 청소가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 한국이라는 땅에서, 교회의 사역은 두가지로 나누어 질수 있다. 한부분은 급격하고, 무분별한 도시 개발에 떨어져 버린 도시의 빈부를 돌보는 수준에서 함께 하는 부분이 하나 있었고, 또 다른 한부분은 엘리트로써, 무분별 하게 도시의 영향력을 받아드려, 도시 개발에 성공과 함께  많은 것을 누릴수 있게 된 종교인들이 있다. 



이들은 진보와 보수 쪽에서 똑 같이 성경책을 들고, 한쪽에서는 개발을 비판하며, 가난한 자를 돌보고 있고, 한쪽에서는 흐름을 타지 못하고, 가난과, 비루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같은 종교인들을 손가락 질 하면서, 세상 깊에 들어가서 영향력을 갖게된 보수측이다. 

그리고 이 양쪽은 대화하지 않고, 양립이 되게 되었다. 

왜 교회가 이렇게 되었는가? 왜 도시에서 떨어진 사람들을 치료에만, 예방할수 있는 영향력은 갖추지 못한체, 신경을 쓰며, 길거리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가?  (SNS에서 지속적으로 비판적인 글을 올리고 있던지) 

왜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 보다는 자기 집 평수가 넓어지고, 항공 마일리지와, 고급 레스토랑의 포인트만 높아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모델은 모든 믿는 자들이 예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영광아래 회복된 예루살렘 성 (시) 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그곳에는 가난한 자들이 없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영광 그 자체이기 때문에, 엘리트? 영향력을 미칠 힘등이 필요하지 않다. 

크리스챤들이여, 먼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바로 성경앞으로 올바른 모습을 찾자. 

우리가 속한 도시는 엄청난 문제가 가득한 곳이다. 
또한 이곳에 하나님의 시선이 있으며, 해야 할 일이 많다.  

계시록 21장 1-5절을 보자. 

21:1 <새 예루살렘> 그후,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전에 있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1:2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마치 신랑을 위해 단장한 신부의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21:3 보좌로부터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서 


21: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으며, 모든 옛것들이 다 사라질 것이다.” 


21:5 그 때, 보좌에 계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겠다! 내가 네게 하는 말은 진실하고 참되니 이것을 기록하여라.”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죽음, 슬픔, 울음, 아픔, 옛것들로 가득하다. 

이곳을 회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부르짖음이 들리는가? 



Transform the city? 

Transform our selves
transform our lifestyle
and have a proper view of the city of God. 


Then, only then, we can transform the city 

Tuesday, 12 December 2017

Built environment and theology

December 12th



It has been awhile that I had given an urban planning a serious thought since my graduate school time.
I almost felt that my master degree was a waste as I could not find the link between that and my interests through the theological lens.  Through this church planting in the middle of one of the megacities of the world was a great hands-on experience, but discussions of a city and its social meaning, opportunities and threats to faith and church, could not be imagined further. That is until I started my reading into these pieces. 

I remember doing a module on green theology and the definition of stewardship- God-given responsibilities to mankind. It was refreshing to see that modern theology trying to revisit some of the earlier assumptions on our relationship with the world and the integral parts of the world. 

These articles expanded my view to even on the built environment. 

Sheldrake's piece was an eye-opener. How different zoning policy of governments actually has separated and disintegrated the sense of communities. The convenience of public transportation, and the urban sprawl meant that people' place of living, leisure, consumption, place of worship being separated, and the traditional sense of community is lost. He mainly looked at children and their play. What we see of our children and their place of a game has changed. We as a contemporary generation, feel the responsibility towards our children and their safety, but in fact, we are creating, distrust, void, empty space particularly in the inner city, which is the reverse of what the parents wanted. More and more empty areas, and the zoned spaces per different usages means that the disintegration will intensify. 

Looking at Seoul, and how my children fit in the city, this is definitely what I witness too. We pick our children's playdates. We drive some distance to drop them off, and rather than hanging with the parents of my boy's friend, I go to a coffee shop nearby and drink coffee, check my SNS until the pre-arranged time is over, and pick my children up. I never let my children go to playground on their own, for fear of any unwelcome attention/threat of lawless drivers and bikers endangering their lives. By doing so, I am putting them in a bubble. Safe, for now, maybe, but for a long term, it is not. 



A little world that every family, and individual creates, it is a threat to the humanity and the sense of community.  On the flip side, this is the time of opportunity. What Acts 1:8 says, reaching out to the end of World with the gospel. The world has become smaller/more individualistic, but that means that each of us, the good news bearer, our role has become more important. 




Friday, 10 November 2017

은사에 대한 생각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님이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 행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을 분별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을 통역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같은 한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이런 은혜의 선물을 나누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2:8-11‬ ‭KLB‬‬
http://bible.com/86/1co.12.8-11.klb


요즘, 성경적인 단어들의 현대화/recontextualisation 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들의 경우도 그러한 것으로 그리스도 가치 위주로 볼 필요가 있을듯 하다. 물론 성경 문자 그대로의 성령의 역사하심도 현 시대에 있지만 새롭게 봐야 하는 것도 있는 것 같아.

방언을 방언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는, 조금은 이기적인 기도로 보면 어떨까?

회중 대표 기도를 하는데, 자신의 삶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 할수 없지 않는가?

이러한 개념으로 보면 어떨까나?

Wednesday, 1 November 2017

Discovering the Bible in the Non-biblical World




The Author is as an Asian feminist theologian, tackle the issue of hermeneutics from very realistic questions.

The starting questions are:
Is the current biblical interpretation, embrace all the readers?
How has the biblical hermeneutics changed over time, and what were its relationships with socio-political forces; including patriarchal traditions, colonialism, and many other historical phenomena?
Are there not marginalised groups of people that the mainstream hermeneutics ignored?
To engage much deeper to look at the questions,
Are the readers in the East experience and come to the similar interpretation to that of the readers in the West?
Are the female experience of the Bible and its interpretation the same as the male's experience?
Are the people of different race read and interpret the bible the same?
The cultural context changes over time, are the hermeneutics remained the same or have changed, or even has been a tool for justification?

Just as the title of the book suggests, the author tackles this head-on.
She looks at how the interpretation was manipulated with different readers with privileged positions, and very often, this causes the readers in the non-biblical world uncomfortable as the book remains the 'foreign'

The hermeneutics that the slave-masters' use of the bible to justify their actions, cannot be shared by the people with their ancestors who were the receiving end of the biblical hermeneutical abuse.

The hermeneutics that the dominant men used to justify their 'rule over the society' cannot be shared by the female believers.

The hermeneutics that the colonial merchants and navy chaplain used cannot be shared by the peasants.

The hermeneutics that the bourgeogies used cannot be shared by the proletariats.

The modern strands of theologies such as black theology, feminist theology, liberation theology, minjung theology, environmental or green theology are largely due to the disjuncture that the readers and believers felt about the mainstream hermeneutics.



Sunday, 1 October 2017

성경에서의 실사 과정

프로젝트 실사.

일을 하다 보면, 제안서를 쓰거나 실사를 해야 할때가 있다.

그런 과정, 복잡한 것은 아니지만, 기업이 투자를 하기 전에 과연 이 것이 올바른 투자 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내면서 요청한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그러한 새밀함이 보인다.

1. 마크로 투자 환경.
- 지형 살피고
- 인구, 땅의 비옥함
- 인구의 강함과 약함

2. 세부적인 내용들 (진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 
- 도시
- 방어체계

3. 이 모든것에 증거
- 땅의 과일. 

교회의 재정이나, 우리 삶에 작은 결정또한 전략적이여야ㅜ한다. 

하지만 그 뒤에ㅜ하나님이 계심을 아는 것이ㅜ가장 중요하다. 



“그 땅의 지형을 살피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강한지 약한지, 인구는 얼마나 되는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도시에 살고 있으며 거기에 성벽이 있는지 없는지, 또 그 땅 토질이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들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그리고 잊지 말고 그 땅의 과일을 가져오너라” (그 때는 포도가 익기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민수기 13:18-20 KLB
http://bible.com/86/num.13.18-20.klb

Monday, 11 September 2017

분쟁조차 하나님께서 이용을 하신다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 불이치의 경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동의가 없을수 있지? 한 하나님, 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가는 것이 아닌가? 
리더에 대한 순종은 어디가고,, 

하지만 이유여하를 떠나, 이는, 복음의 확장의 기회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누시는 방법....  신기하다. 

하지만, 궁금엔, 바울과 바나바는 화해를 (바울의 마가를 받아줌) 하게 되고, 이또한 놀랍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다
(행 15:36)○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행13:4행14:6
(행 15:37)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행 15:38)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행 15:39)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 15:40)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행 15:41)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Sunday, 10 September 2017

군중이란??

“그렇다고 자기를 증거하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열매 맺는 계절을 주셔서 선한 일을 하시고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셨습니다.” 두 사도는 이 말로 겨우 군중들을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몰려와 군중들을 선동하여 자기들 편에 끌어들여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다 버렸다.”
군중심리란? 

숭배했다가, 죽이려고 하는 이들의 모습.
인기나,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을 의식해야 함을 다시 보여준다.
다른면으로는 나는 또한 이렇지는 않은지? 심지가 굳은 사람이 되야 한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이사야 26:3

넘어지고 일어나고 이런 반복은 이제 그만. 
의지 사용이 필요. 

Sunday, 27 August 2017

신독 (愼獨)과 경외

초등학교 도덕시간에 배웠던 개념이 있었다. 
중용에 나오는 신독(愼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보거나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있는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 마음과 태도를 말한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때 배웠던 이것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실패할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혼자 있을때, 바른 마음을 갖으려고 노력을 하였고, 누구에게 보여지기 위해서, 행하기 보다는 나 자신의 양심을 위해서, 도리에 맞게 행동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신앙안에서는, 신전의식의 개념과 융합이 되어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보거나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 다라는 것. 

성경에서 누구보다, 요셉의 모습이 이러하였다. 아무도 없을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 있었을때에, 그는 하나님의 의식하였다.   다윗의 인생의 실패 또한도, 이 모습이 부족하였었다. 그 순간, 그 벌거벗은 여인을 본 그 순간, 신독이 약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나 아픈 짐을 그는 지게 되었다.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도”란 잠시도 떠나지 않는다. 떠나 있다고 한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그 누구도 듣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하고 염려한다. 숨은 곳(아무도 안보는 데)에서 보다 자신의 모습이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고, 은미(역시 아무도 안보는 데)한 데에서 보다 자신이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혼자 있을 때 더욱 삼가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린다.

신앙인으로서, 이것은 어떻게 봐야 할것인다. 신앙인으로의 integrity 를 말을 하는듯 하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컨셉트를 완전히 포함하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경외였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 무소부재하시며, 창조자 되시며,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 사랑의 표현인 그 경외였다. 

어느곳에서나, 특히 혼자 있을때 우리의 행동이 경외의 잣대라는 것이다. 

혼자 있을때, 

여호와를 의식하는가? 

그러는 사람에게 그분의 친밀하심, 보호하심, 배푸심, 구원하심, 긍휼이 여김, 인자하심, 지혜가 가득할 것이다. 

일이던 가정 생활이던 어떤것 이전에 경외를 회복하라. 

아멘.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편 130: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편 25:14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시편 33:18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시편 34:7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편 34:9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편 103:13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시편 103:17
여호와께서...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115:12-13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편 147:11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신명기 6:24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만을 경외하라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셨으나열왕기하 17:39
주를 경외함지혜요욥기 28:28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시편 111:10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편 115:11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잠언 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19:2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이사야 11:3

Saturday, 26 August 2017

Jethro's advice - Good or bad

Exodus 18 decribes Jethro, the father in law of Moses, joining Israelite camp. He sees what God has done, and joins in temporarily and returned home.



While he was with Moses, he sees that Israelites waiting to see Moses with their disputes, and Jethro sees that this is wrong. He claims "What you are doing is not good,,,, now obey my voice, I will give you advice, and God be with you.... So Moses listened to the voice of his father in law and did all that he had said.

What Jethro commanded was that Moses to appoint representatives to deal with small issues that arises in their camp. This would relieve Moses of the heavy workload, and also people can have their grievance dealt with timely.

Many commentators describe this chapter as if Jethro was another wisdom of God to govern over the people of Israel.  Jon Bloom, a staff writer on desiringGod.org says, God speaks with clarity and preciseness, but regarding the secondary or administrative things he leaves much to our figuring. In other words, God cares about 'What' but we are to figure out using God given resources including people, wisdom, technology etc to come up with 'how' .

On the one hand, I can understand where this is from. We have our freewill, and God has implanted in us many different talents to bring forth God's glory in our life settings.
Moses obeyed his father in law, and everyone seems to be happy in the end.

But everytime I read this passage, I am perplexed who Jethro is, and whether his advice was God given or a human understanding that caused the gap to develop. The gap between God's clear message and commands to have Israel remain pure before God's sight, particularly during this time of nation building, where common identity centred around God was key to bring together the unity.

Exodus 33:11 says the Lord used to speak to Moses face to face, as a man speaks to his friend.
What was the criteria for the appointment of judges? Would they have similar extent of focus on God as Moses?

Considering the timing of this, I believe that despite the long wait for the people to see Moses, he should have remained as the only judge.

1) Usefulness of the wait: People's waiting, would have been beneficial as it would have given people time to come to a conflict resolution.

"Matthew 5:25 - Settle matters quickly with  your adversary who is taking to you court. Do it while you are still together on the way"

2) Purity of the message: the slave mentality is demonstrated time and time again, by the people. Judges and the tribe leaders were the same. How would the judges conduct this divine and essential role?
When Miriam and Aaron rebelled against Moses, God was clearly on Moses side, protecting Moses' sole leadership over the people. Why all of sudden would God change the stance?

3) God cares about 'how', not just 'what' : God did not just tell people to build a tabernacle but explained how to build it. This was demonstrated during this time of nation building, and identity (as God's chosen people) building period, God was intervening into the lives of Israel in the deepest and most delicate ways.

4) Jethro - He did not stay with the chosen people, but he returned to his land. At the end of the day he is a gentile, a Midianite. (ver 27 "Then Moses sent his father in law on his way, and Jethro returned or sent back to his own country - why was this so?)

5) People's sinning - After this, God gives the ten commandments and all other commands regarding the tabernacle, priesthood and many others. Despite the laws being issued, people sinned by making an image of God, golden calf, and resisting Moses and God. In retrospect, this would have been inevitable, but there may have been some correlation between this and the reduced interaction between Moses and the people

Jethro's advice is predominantly praised as a God given advice to Moses. I want to think again....



The negativity of 'tolerance'

We talk of a tolerant society.  Tolerance is one of the critical values of modern society that almost all multicultural states uphold ...